글 없는 그림책이 재미있다!

이루리 작가, 평론가

 

내가 찾은 최고의 행복, 그림책

나는 서른 살에 그림책을 처음 보았다.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이 '그림책은 교훈적인 어린이 책' 이라는 나의 편견을 산산조각 내주었고,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은 그림책이 얼마나 멋진 예술작품인지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데이비드 위즈너의 『구름공항』은 그림에서 '이야기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 글 없는 그림책은 나에게 최고의 오락이었다.

많은 한국 선생님과 부모님이 글 없는 그림책을 두려워한다. 그림책을 포함한 모든 책은 교육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권위적인 교육제도 때문에 책을 두려워하게 된 어른들에게 글 없는 그림책은 정답이 없는 문제지다. 책이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다. 입시교육을 통해 문학 작품마저 정답을 강요하는 교육을 받은 결과다.

다행히 오늘 나는 아주 기쁘고 반가운 소식을 전하려고 한다. 첫째, 모든 작가는 독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책을 만들었으며 따라서 책에는 재미와 즐거움이 가득하다. 둘째, 책과 인생에는 정답이 없으며 독자 마음대로 읽고 해석할 자유가 있다. 셋째, 책은 교육의 도구가 아니라 호기심과 즐거움의 도구다.

 

누구에게나 빨강 책이 있다!

바바라 리만이 지은 『나의 빨강 책』은 글 없는 그림책을 두려워하는 한국 선생님과 부모님의 외면 속에 절판된 걸작 그림책이다.

도시의 빌딩 사이로 눈이 내린다. 한 소녀가 인도를 따라 걷는다. 그런데 길 가장자리에 치워진 눈 더미 속에서 빨간 책을 발견한다. 소녀는 빨강 책을 품에 안고 학교로 간다. 수업시간 내내 소녀의 눈길은 가방에 꽂힌 빨강 책에 가 있다. 마침내 소녀가 빨강 책을 펼친다. 책속에는 지도가 있다. 지도 가운데 섬이 있다. 그리고 책속에는 눈 내리는 빌딩숲이 있다. 빌딩 가운데 학교가 있고 창문으로 한 소녀가 보인다. 소녀가 창밖을 내다본다. 소녀가 보고 있는 빨강 책에서는 소년이 책 밖을 돌아본다. 책속에서는 소녀가 웃고 있고 책 밖에서는 소년이 소녀를 바라보며 웃는다. 소녀가 책을 덮는다. 수업이 끝나자 소녀는 책을 들고 교실 밖으로 달려 나간다. 이제 소녀와 소년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기까지가 글 없는 그림책 『나의 빨강 책』을 보고 내가 만든 이야기다. 아마도 독자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 질 것이다. 당연히 이 책에 대한 해석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빨강 책을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인연은 같은 취향을 통해 이어진다. 바로 옆집에 갈아도 취향이 다르면 만날 일도 얘기할 일도 없다. 하지만 취향이 같으면 아무리 멀리 살아도 만나게 된다. 한국에 사는 이루리와 이태리에 사는 엠마누엘레 베르토시가 볼로냐도서전에서 만나 함께 그림책을 만들게 된 것도 그림책을 좋아하는 취향이 이끌어준 것이다. 빨강 책이 소녀와 소년을 이어준 것처럼 말이다.

 

마법의 크레파스

에런 베커가 지은 『끝없는 여행』은 『머나먼 여행』과 『비밀의 문』에 이은 세 번째 작품이다. 에런 베커는 무엇이든 그린 대로 살아나는 마법의 크레파스를 소재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거리엔 빨간 신호등이 켜 있지만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집안에서는 아빠가 2층 서재에서 뭔가를 그리고 있다. 기울어진 넓은 테이블과 그 아래 연결된 기계장치로 미루어 아빠 직업은 건축 디자이너인 모양이다 그런데 아빠의 등 뒤로 빨간 연이 보인다. 연이 왜 서재에 있을까? 연에 이어진 줄이 독자의 시선을 계단으로 데려간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도 연의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문이 있고 문은 열려 있다. 그 방이 바로 연의 주인이자 주인공 소녀의 방이다. 그런데 왕관을 쓴 소녀는 왼손에 빨간 공을 안고 오른손으로는 빨간 크레파스로 벽에 문을 그리고 있다. 한편 일에 몰두하던 아빠는 연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아빠는 떨어진 연을 손에 들고 자세히 들여보다가 소녀의 방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소녀는 자신이 그린 문을 통해 이미 환상의 세계로 떠났다. 아빠도 소녀가 들어간 환상의 문으로 여행을 떠난다. 아빠는 과연 소녀를 찾을 수 있을까?

그리는 대로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의 크레파스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마법의 크레파스'를 꿈꾸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는 능력을 갖고 있다.  '꿈을 말로 표현하고, 꿈을 몸으로 실천하면 꿈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꿈을 꾸는 능력'을 누구나 잘 사용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꿈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꿈을 꾸기 전에 걱정부터 한다. 누구에게나 '마법의 크레파스'가 있지만 크레파스를 어떻게 쓸지는 크레파스를 사용하는 사람의 영혼에 달린 것이다.

 

공원을 헤엄치는 붉은 물고기

곤살로 모우레와 알리시아 바렐라가 만든 『공원을 헤엄치는 붉은 물고기』는 글 없는 그림책 가운데서도 특별하다. 다중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보통 그림책에는 두세 명의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공원을 헤엄치는 붉은 물고기』에서는 공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과 식물들이 저마다 주인공이다. 따라서 등장인물 한명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나는 그림 맨 왼쪽 끝에서 걸어오는 할머니를 주목했다. 구부정한 자세와 힘겹게 들고 가는 장바구니가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여하튼 한 할머니가 장바구니를 들고 간다. 그런데 할머니는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끼고 장바구니를 떨어뜨린다. 너무 어지러워 가로등에 기대선다. 그러다 급기야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할머니는 가로등을 기대고 앉아 완전히 정신을 잃는다. 그런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모두 힐끗 쳐다볼 뿐 갈 길을 간다. 이제 할머니는 어떻게 될까?

이 책은 등장인물의 수만큼 이야기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에는 식물과 동물과 사람이 모두 포함된다. 그런데 왜 공원에서 물고기가 허공을 헤엄치고 다닐까? 공원을 헤엄치는 붉은 물고기는 사랑의 기적을 상징한다. 우리 삶은 사랑의 기적으로 가득 차 있다. 이별의 슬픔 뒤에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고 절망의 끝에는 새로운 희망이 있다. 태어나고 자라고 병들고 죽지만 새 생명을 남기고 또 다시 새로 태어난다. 사랑의 기적만이 불가사의한 자연과 인생을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 『공원을 헤엄치는 붉은 물고기』는 스페인 문학의 특징인 마술적 사실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환상적인 그림책이다.

 

주인공이 되어 온몸으로 체험하라

이상 세 권의 글 없는 그림책에 관한 이야기와 해석은 나의 관찰과 상상의 결과다. 분명히 다른 독자들은 다르게 읽고 다른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림책은 이미지로 삶을 표현하는 예술이며, 독서는 온전히 독자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부디 그림 속에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발견하라! 그리고 주인공이 되어 그림책을 온몸으로 체험하라! 오직 충분한 체험만이 당신의 감정을 달래주고 영혼의 눈을 뜨게 하리라!

 

 

 

필자소개 : 이루리

동화작가, 그림책 평론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