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흰 눈
공광규 글
주리 그림
바우솔
2016.05
신기하고 고마운 시절
참 신기하고 고마운 시절입니다. 요즘은 저더러 직접 고르라면 아마도 결코 고르지 않을 책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물론 예전에도 제 취향이 아니더라도 검토해야 할 책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취향이라는 편견의 벽을 뚫고 본질을 보게 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참 미숙했고 여전히 미숙합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깨우쳐 줍니다. 게으른 서평가인 저에게도 꾸준히 책을 보내주시는 여러 출판사분들이 저의 편협한 눈을 더 밝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저와 모임을 함께 하는 그림책을 사랑하는 여러분 덕분에 정말 다양한 작품들의 진미를 맛보게 됩니다.
그동안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열어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일이 즐겁습니다. 저와 그림의 취향은 다를지라도 작품 안에서 고귀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리 작가의 마술
그림책 『흰 눈』 표지에는 하얀 벚꽃송이들이 가득합니다. 마치 흰 눈이 아니라 벚꽃이 주인공인 것 같습니다. 벚꽃송이들 뒤로는 배경처럼 시골집과 누군가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벚꽃송이와 시골집 사이로 꽃잎들이 흰 눈처럼 휘날리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경탄할만한 이 아름다운 표지를 저는 아주 무심하게 넘겨봅니다.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은 제 취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면지는 상대적으로 단순해서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더구나 꽃잎이 흩날리는 하늘을 과장해서 벚꽃송이가 통째로 휘날리는 것으로 표현한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과장하고 '뻥'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조금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첫 장면에서 흰 눈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회색빛 겨울 하늘과 그 사이로 흩날리는 흰 눈이 정말 꽃잎 같습니다. 표지와 면지에서 흰 눈 같은 꽃잎을 날리더니 첫 장면에서 꽃잎 같은 흰 눈을 날린 것입니다. 주리 작가는 세 장의 그림으로 꽃잎이 흰 눈이 되고 흰 눈이 꽃잎이 되는 마술을 보여줍니다.
공광규 시인은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이 매화나무 가지에 앉았다고 합니다. 주리 작가의 그림에도 하얀 눈이 내려와 하얀 매화꽃이 됩니다.
이 장면에서 마침내 누군가 시골집의 문을 열고 나옵니다. 그런데 얼굴을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왜일까요?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더불어 마당에 내려앉은 꽃잎이 이제는 꽃잎으로 보이지 않고 흰 눈으로 보입니다.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이 매화꽃이 되고 벚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공광규 시인은 네 줄의 시로 하얀 눈이 매화꽃이 되고 벚꽃이 되는 마술을 보여줍니다.
이제 눈은 조팝나무 가지에도 앉고 이팝나무 가지에도 앉습니다. 온 세상의 흰 꽃은 모두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누이 내려앉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앉다가 앉다가 더 내릴 곳이 없으면 눈은 어디에 내려앉아야 할까요? 공광규 시인과 주리 작가는 이제 두 번째 마술을 보여줍니다.
공광규 시인의 상상력은 따뜻합니다. 차가운 눈을 어쩜 이렇게 따뜻하게 그려냈을까요? 주리 작가의 그림도 매력 적입니다. 꽃잎과 흰 눈을 어쩜 이렇게 조화롭게 그려냈을까요?
공광규 시인과 주리 작가가 그려낸 두 번째 마술은 제 마음을 출렁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나도 꽃을 피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마음속에서 언제나 그리운, 한 사람을 다시 꺼내 보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하얀 눈꽃 같은 우리 할머니입니다.
흰 눈이 흰 꽃이 되는 것은 분명 마술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이기도 합니다. 겨울에 내린 눈을 먹고 봄에 만물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흰 눈이 흰머리가 되는 것도 마술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흰 눈을 먹은 만물을 자라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얀 눈이 노인의 머리에만 흰 꽃으로 다시 피는 까닭은 사람이 늙어서야 비로소 나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늙는다는 것은 나무가 되고 꽃이 된다는 뜻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자연으로 돌아갈 테니까요.
흰 눈이 흰 꽃이 되는 마술보다 사람이 나무가 되는 마술이 진짜 마술입니다. 한 사람이 노인이 되고 다시 나무가 되려면 정말 오랜 세월과 사랑과 웃음과 눈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시와 그림으로 자연과 인생의 마술을 보여주는 그림책, 바로 『흰 눈』입니다.

필자 소개: 이루리
동화작가, 그림책 평론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